아시아여성네트워크_김은규_태국
그들의 눈동자에는 낯선 슬픔이 있었다. 그러나 입술은 웃고 있었다. 2년 전 캄보디아에서 봉사단원으로 활동했을 때 보았던 미소와는 다른 것이었다. 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의 불협화음이 이곳에서 만난 ‘현지인(?)’의 얼굴들에서 가장 자주 목격한 것이었다. 내가 ‘현지인’이라는 단어 옆에 물음표를 넣은 것은 그들이 우리가 흔히 봉사 현장에서 만나는 현지인들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이방인’, 희망을 섞어 말하자면, ‘방문객’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작은 미얀마’라고 불리는 태국 매솟으로 봉사단 파견을 받았다. 태국 영토 안에 있지만, 아무리 국경 지역이라 해도, 지나칠 정도로 미얀마인들이 많은 곳이다. 태국 원주민들보다 미얀마 이주민의 수가 더 많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 거주하는 이주민들이 아닌, 군부 쿠데타와 내전으로 피난을 온 난민 (난민 지위를 인정받지 못한, 흔히 말하는 불법체류자) 이 대다수였다. 이들은 나보다 길게는 2~3년 먼저 건너왔거나, 짧게는 나보다 최근에 건너온 이방인들이었다. 나는 이들을 ‘현지인(?)’으로 만났다. 이들의 언어를 현지어(?)로 배웠고, 이들의 문화를 현지 문화(?)로 경험했다. 또 한편으로는 이들을 대하는 진짜 현지인들인 태국인들의 태도를 보며, 때로는 이해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분노를 느끼기도 했다. 파견 전후로 이어진 우리나라의 정치 상황(비상계엄령과 내란극복의 과정)을 뉴스로 접했고, 봉사 기간 내내 이어진 태국-캄보디아의 갈등과 전쟁으로 인한 안타까운 소식들을 2년 전 만나 인연을 맺었던 캄보디아 현지인 친구들을 통해 접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3개국의 소식과 관계를 접하면서 한 국가의 발전은 정치적 민주주의가 전제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외국인이라는 신분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참 적을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구한말, 일제 강점기, 분단과 한국전쟁, 수십 년간의 민주화 과정에서 우리나라를 찾아 왔던 외국인들, 특히 국제개발협력으로 온 이들은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기도 했다. ‘국제개발협력’이라는 이름 아래 국가 간 갈등 상황에서 어느 한쪽을 편 들 수 없고, 타국의 국내 정치 상황에 이러쿵저러쿵 훈수를 두거나 어느 한쪽을 지지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기에, ‘인권’이라는 가치에 중점을 두고 말하고 행동했다. 하지만 정의를 쏙 빼고 인권을 말하는 것이 참 어려웠고 어울리지도 않았으며 한쪽 눈을 가리고 거짓말을 하는 것 같이 답답했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낯선 슬픔이 있었다.
그들도 나처럼 이곳에 이주, 아니 방문했다. 나에게는 고국으로 돌아갈 날이 다가오고 있지만, 그들에게는 돌아갈 집과 고향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미얀마 국내 상황이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그들이 이곳에서 합법적 체류자격을 얻어 당당하게 새로운 삶을 시작할 기회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온갖 태국 국내법으로 이들의 행동반경은 좁았고, 얻을 수 있는 취업의 기회는 매우 적었다. 로또 당첨처럼 간혹 유럽 등의 선진국으로 취업이 되거나 유학의 기회를 얻는 이들도 있었으나 대다수 현지인(?)들에게는 좀 과장하자면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웃고 있었다. 왜 웃지?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웃을 수 있지?
나는 이곳에서 GBV(젠더기반폭력) 생존자들과 Boarding House에 사는 아이들을 주로 만났다. 체류자격이 미흡한 상태로 급하게 피난 온 타국의 땅에서 젠더폭력 피해를 당한 이들의 상황은 더욱 처참했다. 국가폭력과 전쟁 트라우마를 겪는 상황에서 설상가상 더 지독한 젠더폭력의 트라우마가 덧씌워졌다. 국가 공권력 자체가 두려운 마당에 주변에서 만나는 이들마저 두려움의 대상이다. 이들이 믿고 의지할 사람이 있는가, 이들이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방 밖을 나가지 못하고 생을 마감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이들도 있었다. 폭력을 당해도 법적으로 보호받기 어렵고, 받을 수는 있다지만 그 절차가 어렵고 언어의 벽도 만만치 않을 뿐 아니라, 공권력 자체가 두렵다. 여성에 대한 차별적 문화가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전통적 문화는 차치하고 미얀마 공동체 전체가 아픔을 겪고 있는 터라 이들의 아픔에 특별한 관심을 둘 마음의 여유가 없다.
Boarding House의 아이들은 또 어떤가. 이 아이들은 자신들이 살던 곳이 내전으로 위험하게 되고 학교가 문을 닫으면서, 부모들에 의해 이곳 태국으로 보내졌다. 고향의 인터넷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에 부모와의 연락이 순조롭지 않고, 이곳에 오고 나서 부모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진짜 고아가 된 아이들도 있었고, 가족과 소식이 끊긴 아이들도 있었다. 태국 정부가 미성년자들에게는 비교적 관대한 정책(불법체류자 단속에서 학생증이 있는 아이들은 제외)을 하고는 있지만,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고스란히 안고, 내전과 가족을 잃은 상실의 트라우마를 떠안은 채, 부모 없이 스스로 생존해야 하는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입술은 웃고 있었다.
내가 ‘밍글라바’하고 인사를 건네면 그들은 여지없이 미소를 지었다. 오래된 문화에서 온 습관적인 미소라 할지라도 슬픈 미소였고, 동시에 유일한 희망이었다.
이곳에 아시아여성네트워크가 ‘사랑의 열매’의 기금을 받아 상담센터 Maesot Lighthouse Counseling Center를 개설하고 GBV생존자들을 위한 개인상담, 집단상담, 예방교육, 생계기술훈련, 일시쉼터를 제공했다. 또한 KCOC의 도움으로 봉사단원을 파견해 아이들에게 음악교육을 제공했다. 유일한 희망인 그 ‘미소’에 색깔을 입히기 시작한 것이다. 절망하고 있던 이들에게 친구가 되어 주었고, 기댈 곳이 없던 이들에게 편안한 그늘이 되어 주었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던 이들에게 등대가 되어 주었다. 시무룩해 있던 아이들이 리듬을 찾고 박자를 맞추며 슬픈 눈동자에 열정이라는 눈빛이 살아났다. 이러한 과정에 함께 하면서 나는 최대한 그래도 ‘믿을 만한’ 아저씨가 되려고 노력했다. 함께 슬퍼하기보다는 희망의 미소를 함께 지어주는 선생님이 되려고 노력했다.
“미스터 김, 그래도 우리 이거 계속할 거예요”
상담센터의 지원이 중단된다는 소식에 그들이 나에게 한 말이다. 내가 애써 짓고 있었던 미소의 입꼬리에 줄을 매달아 끌어 올리는 듯한 말이었다. 그들이 짓던 미소는 일시적인 것도, 내 것처럼 인위적인 것도 아니었다.
아시아여성네트워크가 ‘사랑의 열매 지원사업’을 계속 받을 수 없게 되어 상담센터 운영과 봉사단 파견을 할 수 없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이 사업을 통해 상담센터에 채용되어 일하던 직원들 전원이 한 명도 빠짐없이 사업기금지원이 중단되어도 사업을 지속하겠다고 스스로 나선 것이다. 몇 달이고 인건비를 받지 못하고, 상담센터 임대료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임에도 이 사업의 필요성에 모두 공감한 것이다. 지원이 종료되고 두 달이 되어가는 이 시점에는 오히려 두 명의 인원이 자원봉사 하겠다고 합류했다. 물론 그 ‘미소’를 지으면서 말이다.
한 에피소드를 공유하며 에세이를 마감하려 한다. 상담센터에서 운영하던 쉼터에 긴급한 전화가 걸려 왔다. 한 여성이 길에 버려져 울고 있다는 것이다. 만삭이 채였고,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가정폭력을 피해 브로커의 도움으로 미얀마에서 이곳까지 왔는데, 자신의 신분증을 포함한 모든 짐을 브로커가 가져간 채 빈 몸으로 길에 버려졌다는 것이다. GBV피해 여성이고 긴급한 사정이라 쉼터 입소가 허락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쁜 딸을 출산했다. 그 과정을 쉼터 담당 직원, 상담사들, 함께 입소했던 이들이 함께했다. 그러나 산후조리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이 산모는 아기를 쉼터에 남겨 둔 채로 어디론가 가버렸다. 연락이 되지 않았다. 어찌할 도리없이 이 신생아를 쉼터에서 돌보고 있을 때, 한인 교민 모임에서 이 아이 이야기를 무심코 꺼냈다. 그러자 한 커플이 관심을 보이며 입양을 하고 싶어 알아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한인 커플이 아기를 만났고, 강한 입양 의사를 보여 태국 보건당국의 정식 입양 절차를 밟기 시작했고, 현재 이 아이는 한인 가정에서 건강하게 지내며 매솟 한인 커뮤니티 전체의 사랑을 받고 있다. 민간 국제협력이 이루어져 아름다운 가정이라는 열매가 맺어진 것이다.
두 번째 해외 봉사활동을 마치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 국제개발협력은 수혜자와 공급자의 관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봉사활동은 더욱 그렇다. 내가 가진 무엇인가를 그것을 가지지 못한 이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협력’은 희망을 ‘함께’ 짓는 것이다. 만성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말이다. 예수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여라‘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내 몸처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런 사랑은 나와 너의 구분을 흐릿하게 하는 거였다. 문화의 차이, 사고방식의 차이, 생활 방식과 수준의 차이, 심지어 국경의 경계선마저 흐릿하게 하는 거였다. 나는 이 혁명적 발언을 나도 모르게 실천하는 경험을 한 것이다. 이제 나에게 남은 과제는 이 경험을 지속 가능하게 하여 내 삶으로 체화하는 것이다. 무겁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흥분에 가까운 기대감으로 여겨진다. 지금으로서는.
이런 경험과 과제를 갖게 해준 KCOC, KOICA, 그리고 아시아여성네트워크에 큰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