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김진희). 간단히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E(김은규). 저는 현재 아시아여성네트워크의 자원활동가이면서 KOICA NGO 봉사단으로 매솟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은규라고 합니다.
J. 매솟에 대해 언제부터 관심을 갖고 활동을 하시려고 생각을 하셨어요?
E.아시아여성네트워크에서 미얀마 IDP 여성들을 위한 활동을 하고 분쟁 시에 인권 침해 실태 조사를 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같이 함께 했었고 그게 2019년이었던 것 같아요. 계속 미얀마 이야기를 하다 보니 미얀마에 한번 가보고 싶었죠. 당시에는 학교 교사할 때였으니까 방학 때 미얀마로 한 달 여행을 했었어요. IDP 캠프를 중심으로요. 처음에 양곤을 갔다가 재봉틀 하는 까친 주 바모에 갔다가 인권 침해 실태 조사한 게 친주의 팔레트와였거든요. 서쪽 끝인데 친주와 라카인주 경계선에 있는 마을에서 그런 일이 발생한 거예요. 거기 IDP 캠프들은 거대한 산맥이 가로막고 있어서 북쪽으로 올라가지 못해요. 라카인주로 강을 따라 배를 타고 내려와서 강가 주변에 캠프를 만들어서 거기서 지내요. 대도시에서 한 서너 시간 떨어진 곳이에요. 거기는 위험한 지역이어서 가지 말라고 하고 양곤에 있는 NGO 단체 중에 우리랑 협력하고 있는 단체도 가지 말라고 했었어요. 다들 말려도 가고 싶다고 했더니 현지 NGO 직원을 소개해 주면서 이 사람 안내를 받아라. 외국인 티 전혀 내지 말고 미얀마 사람으로 복장도 싹 바꾸고 말 한마디 하지 말고 눈에 띄는 행동하지 말고 조용히 갔다가 조용히 와라고 주의를 줬어요. 시장 가서 미얀마인들이 입는 옷을 사서 갈아입고 공항에 마중 나와 있던 현지 NGO 직원이랑 같이 택시를 대절해서 네댓 시간 떨어진 캠프에 갔어요. 가는 중에 불 타 있는 차, 폭탄 자국 난 차들이 길가에 있어서 무서웠어요. 캠프를 갔더니 거기에 방문한 최초의 외국인이래요. 눈에 띄는 행동하지 말라고 그랬었잖아요. 아라칸 군대가 타깃으로 삼고 몸값을 요구하거나 뭐 어떻게 할 수 있다. 게다가 여기 IDP에 온 사람들은 아라칸 군대들을 적대시하는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니까 그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에 대해 되게 안 좋게 생각할 거다. 그래서 눈에 띄면 어떤 해코지를 할지 모른다. 그게 주의 사항이었는데 조그맣고 젊은 목사님이 영어를 할 줄 알아서 통역을 해줬는데 저를 갑자기 그 캠프 공터로 데려가는 거예요. 캠프가 크게 학교 운동장처럼 생겼는데 거기에 대나무로 집을 대충 지어서 살고 있거든요. 벽 없는 천막만 있는 모임 장소 같은 데에다 테이블 갖다 놓고 나를 앉히더니 그 주변으로 캠프 사람들이 다 모여서 이렇게 앉아 있는 거야. 그러고는 저더러 한마디 하래요. 어쩔 수 없이 그냥 솔직하게 얘기했죠. 나는 한국에서 왔고 여러분들의 사는 모습을 보고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고민도 하고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한국에 가서 사람들에게 전하려고 왔다. 식량이 필요하고 애들 교육 문제가 심각하고, 마실 물이 없다. 그래서 내가 마실 물은 어떻게 하냐 그랬더니 우물을 하나 파 줬으면 좋겠다. 그 목사님한테만 내가 여기 마을 우물을 하나 파주고 싶으니까 얼마인지, 어떻게 해야 되는지 견적을 뽑아가지고 나한테 보내달라고 하고는 그냥 캠프를 돌아다녔어요. 사람들 처참하게 사는 모습을 많이 봤죠. 대나무 집 조그만 방에, 여기(인터뷰 공간이었던 스페이스포유, 20명가량 수업 가능)의 4분의 1 정도 되는 공간에 아홉 명이 산다거나, 샤워할 데도 없고 화장실도 없어서 내가 돌아다니다가 어떤 아줌마 샤워하는 나체를 봤다니까요. 나를 보고 깜짝 놀라. 그냥 집 앞에서 이렇게 막 씻고 있는 거야. 어떤 가림막도 없이…… 화장실도 그냥 막대기 하나 꽂아놓고 천 이렇게 둘러놓고 거기다 구덩이 파서 일보고 하는 걸 보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지만 우물 하나는 파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고는 가야겠다. 여기 있으면 오랜 시간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걱정이 들어서 그 목사님한테 이제 갑시다 그러고서 차를 타려고 그러는데 삐쩍 마른 아저씨가 갈비뼈가 다 드러나도록 삐쩍 마른 아저씨가 어~! 소리 지르면서 뛰어와요. 멍키 바나나 한 손을 나한테 주는 거예요. 미얀마 사람들이 손님 대접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거는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내가 부자 나라에서 왔다는 것도 알면서도. 제가 아무리 우리나라에서 가난한 축에 속한다 해도 당신들보다는 잘 사는 데…… 그때 이 사람들이랑 같이 뭔가를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됐어요.
그러던 참에 황정아 대표님이 쿠데타 일어나고 우리 재봉틀 사업 어떻게 해요? 그게 다 끊겼어요. 우리 조사 실태 보고서 냈는데 이 보고서가 미얀마 전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상황이 돼버려서 우리 보고서의 가치가 다 떨어졌대. 이미 매솟이라는 곳에 사람들이 많이 와 있다니 거기서 뭔가를 하는 방법을 생각해 봐야 되겠다 이러시더라고요. 저는 그때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미얀마에 갈 생각을 하던 참이었는데 그때쯤 쿠데타가 터진 거예요. 어쩌나 그러고 있는데 황 대표님이 KIOCA 봉사단원 파견하는 게 있다. 우리 단체는 못 보내니까 다른 단체를 통해서 한 번 경험 삼아 미얀마는 못 가지만 그 주변에 다른 나라를 한번 다녀오는 게 어떠냐고 해서 캄보디아에서 다른 기관의 봉사단 활동하면서 휴가를 받아서 매솟에 온 거예요. 버스 타고 캄보디아에서 버스 타고 방콕-방콕에서 버스 타고 또 매솟으로 18시간 걸려 여기를 처음 와봤어요. 2023년 여름에.
J. 매솟에 대한 첫인상은 어떠셨어요?
E. 첫인상은 깨끗한데! 생각보다 잘 사는데! 근데 잘 사는, 내 눈에 보이는 잘 사는 건 다 태국 사람들이 영유하는 삶이었고 황정아 대표님이 누구누구 찾아가 봐라 그렇게 찾아간 이민자 스쿨 한 군데랑 누굴 찾아가서 만났는데 거기에 미얀마 사람들이 있는 걸 보니까 여기는 도심이랑 또 다른 모습으로 사람들이 사는구나. 여기가 태국인가 미얀마인가 막 헷갈릴 정도로. 여하튼 그래서 그렇게 처음 왔고 저한테 제일 매력적인 거는 캄보디아에서는 저는 외국인이었거든요. 주목받는 외국인. 캄보디아에는 외국인이 별로 없고 저희 봉사단 한국 사람 몇 명 그러니까 어디 가나 눈에 띄고 외지인이고 외국인인 거예요. 근데 여기 오니까 다 이방인이 천지야. 미얀마 사람, 서양 사람, 인도계 사람 여기는 내가 외국인으로 안 살아도 되겠구나. 그게 제일 좋았어요. 저만 이방인인 게 아니라는 게.
J.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점이네요. 또 다른 매력은?
E. 화려함과 순수함이 동시에 섞여 있는 도시라는 거예요. 로빈슨 같은 데 가면 막 화려하고 세련되고 고급스럽고 조금만 나가면은 판잣집 있고 허름하고 그게 동시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어려운 환경에서만 있으면 지칠 수도 있는데 가끔 이렇게 로빈슨 같은 데 가서 기분 전환하고 올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죠. 지금은 샬롬 홈 아이들 생일 파티를 로빈슨에서 해 주거든요. 저 혼자는 잘 안 가는데 아이들 데리고는 가게 되거든요. 그 기회에 환기가 되는 거예요.
J: 올해에는 아시아여성네트워크가 파견한 봉사단원으로 오셨잖아요. 그전엔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매솟에 오셨고 올해는 본격적으로 파견이 되셨는데
E : 파견되기 전에 선교사로 먼저 왔어요.
J. 선교사로 먼저 오셨으면 그때는 무슨 활동을 하신 거예요?
E. 이곳 Space for you(공유 공간, 교육, 모임 등을 할 수 있는 무료 공간 제공)도 열고 와 샬롬 홈하고 빤뾰랏 학교랑 관계 맺고 그랬죠. 아! 우물은 제가 미얀마 사람들에게 우물 파주겠다고 약속했었잖아요. 근데 그 목사님하고 연락이 끊겼어요. 쿠데타 일어나고서. 아무리 메시지를 보내도 답을 안 해. 몇 달 만에 연락이 오고 막 이래요. 그러던 참에 양곤에 있는 IDP 캠프에서 활동하는 친주 출신 성공회 교단 목사님하고 연락이 됐어요. 이 분이 유학과정 다 마치고 논문만 남아서 양곤으로 돌아가서 보니까 내전 터지고, 코로나19 유행하고 하면서 IDP가 급증을 했더래요. 양곤 인근에도 친족이 사는 모여 사는 마을에 IDP가 많더라. 이 사람들은 어디서 도움을 받는 캠프 형태로 수백 명 몰려 살고 그러는 게 아니고 동네 곳곳에 흩어져서 공터에 대나무 짓고 이렇게 산다. 그냥 피난 온 거다. 땅 주인이 불쌍해서 그냥 이렇게 있어도 된다고 해도 전기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그냥 대나무로 집 짓고 산다. 그럼 여기서부터 시작을 해야겠다. 몇 개가 필요하겠냐, 내가 후원자를 찾아볼게, 가격이 당시만 해도 100달러였어요. 하나 파는데 100달러. 엄청 쌌죠!. 13만 원. 그럼 제가 찾아볼게요. 그러고서 우리 교회 교인들하고 소속된 단톡방에다 얘기를 했더니 금세 차버렸어요. 8개가~멋지게 금박으로 기증자 이름 새겨 넣어서. 완성 사진 찍어서 보내 주니까 사람들이 기분이 좋은 거야. 자기가 100달러를 가지고 큰일 한 것 같잖아요. 주변에 막 자랑하고. 자기도 하나 파고 싶다고 막 연락이 와요. 그 즈음에 제가 교회에서 설교를 하면서 예전에 난민 캠프 가서 바나나 받았다. 이 바나나 때문에 미얀마 선교를 시작했다. 바나나를 준 삐쩍 마른 아저씨 덕분에. 그런 얘기를 하고 집에 왔는데 그쪽 목사님한테 연락이 온 거예요. 그날! 정말 기다렸다고 했죠. 얘기 들어보니까 거긴 너무 외지고 물류가 잘 안돼서 우물 하나 파는데 300달러가 든대요. 3배가 넘죠. 그래서 후원자 중에 가족이 각 100달러씩 3개 하겠다고 한 집에게 너희 가족 이름으로 더 어려운 지역에 하나 파는 걸로 하자고 제안했죠. 그런 후원자를 모아서 그쪽에 4개를 팠어요. 쿠데타가 일어나서 돈을 보낼 수가 없어서 돈 보내는 것도 007작전 같았어요. 양곤에 가서 양곤에 살고 있는 목사님 여동생을 만나서 아는 사람 통해서 쥐여주고서 전달해달라고 하고 전달받았다. 공사 시작했다는 이야기까지는 들었어요. 그러고는 또 연락이 안 되고 1년 정도 지났어요. 이야기 듣기로는 인터넷이 안 돼서 인터넷 되는 곳으로 나올 때 이런저런 일하고 연락한다고. 그때 300불 후원한 사람들은 아직 명패를 못 보여줬죠. 더 큰돈 후원했는데.
지금까지 한 30개 정도 팠고 우물 파는 일은 계속하고 있어요.
이 센터(Space for you, 공유 공간)는 Sister to Sister 슐레이 덕분에 시작하게 됐는데 미얀마 CSO나 작은 자조 모임들, 작은 청년 그룹들이 모일 장소가 필요하다. 모여서 뭘 해야 되는데 커피숍 가면 돈 내야 되고 어디 빌리면 또 장소도 대여비가 든다. 당신이 뭘 할 거면 가게 차리는 것보다 이런 공유 공간 만들면 좋겠다. 방콕이나 치앙마이는 공유 공간 개념이 있는데 매솟에는 없다. 그래서 시작했어요. 자유롭게 구글 폼으로 사용 신청하면 무료로 다 사용하고 여기 기부 박스에 자율 기부하는 걸로.
또 샬롬 홈 아이들 1:1 결연하고 가르쳐 주는 것도요. 처음 제가 왔을 때만 해도 열몇 명이었는데 지금은 30명 됐거든요. 올 초에 12명이었는데 벌써 30명 됐고 그중에 9명이 결연을 하였어요. 그걸로 그냥 거기 생활비 쓰는 거예요.
J: 정식 봉사단원이 되어 매솟등대센터를 관리하면서 겪는 어려움은 없나요? 국내에서 일할 때와 여기서 일할 때 직원들과의 관계가 한국과 다르다거나 이건 좋고 이건 안 좋다는 게 있나요?
E : 한국은 권위주의 사회를 지나서 민주화 시대로 진입한 상태잖아요. 그러니까 민주적 리더십이 먹혀요. 현재 한국은 그걸 선호하고 수평적인 거를 더 잘 따라요. 사람들이 권위적이면은 일단 반감이 들잖아요. 그래서 저는 민주적, 수평적인 게 딱 몸에 뱄거든요. 권위적인 걸 못해요. 제가 너무 싫어하니까. 근데 여기 와보니까 권위적이어야 하는 거예요. 어느 정도. 처음에는 제가 결정을 잘 안 했어요. 물어봤어요. “ 너의 생각은 어떠냐? 너의 생각은 어떠냐? 우리 생각이 이러니까 이렇게 합시다 “라고 했는데 사람들이 자꾸 제 결정을 물어보는 거예요. 어떻게 생각하냐고. 그래서 아니 너희들이 결정을 해 그랬더니 디렉터가 정해주면 우리가 그걸 따르겠대. 그렇게 결정해야 되는 순간들이 많고 그걸 더 편안하게 생각하는구나 싶고 자율권을 너무 크게 생각해버리는 경향이 있어서 조정 중이에요. .또 우리 사무실에서는 제가 유일한 남자에 유일한 외국인이잖아요. 그래서 좀 외롭기도 해요. 여기(매솟에선) 나만 이방인이 아니구나 싶어 좋았는데 센터에 가면 나만 이방인이 되는 거예요. 다 미얀마 사람들이고 다 여자들이고.
J : 지금 집단 상담에 대한 반응이 좋잖아요. 어떤 생각을 하셨어요? 이 정도일 줄 알고 계셨어요?
E : 짐작했어요. 한국도 그렇거든요. 한국도 예술 치료 경험을 안 해본 사람들이 이게 뭐야 막 이러다가 경험해 보면 너무 좋아해요. 다들 반응이 신선하고 좋다고 해요. 미얀마 사람들은 워낙 자기 이야기를 잘 안 하는 문화에다가 상담 자체가 주로 1:1 포맷으로 집단 형태로 하는 데가 별로 없어서 미술 치료를 하기를 정말 바랐는데 찾고 찾다가 못 찾아서 내가 해버려야겠다는 생각도 했거든요. 해린이(상담센터 통역담당이자 쉼터 담당자)는 ”저 통역 못해고“ 이러니까 어쩌나 하고 있는데 정말 우연히 우리 센터에 상담 요청을 했던 소년 병사에게 현재 하고 있는 단체를 소개받은 거예요.
J. 봉사단원에서 언어 교육을 해주는데 회화로 안 하고 문법 정도로 문법 위주로 배우신 건가요?
E : 회화랑 문자 위주로 배웠죠. 보통 외국어를 접근할 때 문자부터 하는 데가 있고 말부터 하는 데가 있어요. 문자는 아예 모르고 일단 말부터 소리를 듣고 한국어로 소리 나는 대로 막 적어서 ”밍글라바’ 하면 ‘밍글라바’ 한글로 적고 안녕하세요 하는 거죠. 그래서 그냥 머릿속은 한국어가 떠오르고 한글이 떠오르고 말은 미얀마어로 하는 게 말을 배우는 거고요. 그게 더 빠르고 회화가 빨리 늘긴 해요. 발음도 엉망이고 뭐랄까 글자 나오면은 하나도 못 읽고 하는 단점이 있지만요. 문자를 먼저 배우면 일단 글이 익숙해지니까 배우는 학습 속도는 점점 점점 빨라지겠죠. 처음에는 엄~청 느리게 가다가 어느 순간 빨라지는 것 같아요. 제 경험상으로도 그렇고요. 저는 여기 계속 있을 생각이니까 봉사단원이든 아니든. 정도를 가야겠다. 그래서 문자부터 해야겠다. 태국어는 그냥 말로만 어쩌다가 한 번씩 배우고 글자는 아예 그냥 태국어는 버리고.
J :목사님 목표는 연극 치료를 하는 건데 그걸 하려면 몇 년이나 걸릴 것 같으세요?
E : 한참 걸리겠네요. 다. 미국 유학하는 것처럼 한참 걸리는 거죠. 근데 속도는 점점 빨라질 것 같아요. 어느 정도 감이 잡혔고 발음은 어렵지만, 어순이 있고, 조사가 있는 건 우리말과 같아서 속도는 점점 빨라지는 것 같아요.
J : 마지막으로 우리 회원들한테 이 해외 지원 사업의 가치를 어떻게 말씀해 주신다면?
E. 항간에는 한국에도 어려운 사람들 많은데 왜 한국 사람들 안 돕고 외국 가서 그러냐 그런 소리를 많이 들었거든요. 선교도 한국 사람들을 위해서 선교를 할 수도 있고 한국에 있는 외국인을 위해서 선교를 할 수도 있는데 꼭 외국까지 가서 해야 되겠냐 그랬는데 이거는 그냥 민족 중심 사고, 국가 중심 사고에 아직 우리가 매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고 이게 우리나라, 남의 나라 이런 건 그런 건 좀 이제 깨도 되지 않나 이런 생각이 좀 들고요. 우리가 해외 사업을 하는 게 해외에 우리보다 못 살고 가난한 사람들 돕는 사업이라고만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사실은 우리가 성장하는 계기다. 우리가 우물 안 개구리가 안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와 전혀 다른 환경에서 전혀 다른 사고방식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들을 만나고 이들과 함께 공동의 가치를 추구하면서 뭔가 사업을 한다는 것은 그들을 돕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들에게 어떤 긍정적인 성장에 영양분을 주는 것이고, 우리도 그들로부터 우리가 좀 확장되고 좀 더 큰 사람, 좀 더 나은 사람, 큰 단체, 좀 더 나은 단체가 되게 하기 위한 영양분을 그 사람들로부터 받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